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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비전의 허와 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이 2020년까지 매출 4000억달러와 40조원을 각각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양사 모두 현 시점 대비 4배의 매출목표를 제시했다. 삼성은 실행 슬로건으로 'Inspire the World,Create the Future(전 세계에 영감을 불어넣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자)'를 내놓았고 SK측은 'IPE(산업생산성 증대)전략을 앞세워 글로벌 ICT 리더가 되겠다'는 비전을 설정했다. 성장정체 국면을 선제적으로 타개해나가겠다는 양사의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두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2020년을 겨냥한 미래 비전을 준비하고 있다.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 도래를 앞두고 앞다퉈 세기적 비전을 내놓았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시기적으로도 그럴 때가 됐다.  

  하지만 애써 마련한 비전이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조직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그릇된 자만심을 부를 수도 있고 '한번 맘대로 해봐라'는 냉소주의를 야기할 수도 있다. 

  기업의 미래 비전은 간결하고 선명해야 한다. 한두 가지의 키워드로 전 임직원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세계 스포츠산업을 석권해온 나이키의 비전은 'think different(다르게 생각하라)'였다. 자율성을 기반으로 창의성을 극대화한다는 나이키의 기업문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더 이상 보험을 팔지 않는다. 우리는 스피드를 판다'는 구호는 미국 최대 자동차보험회사인 프로그레시브의 슬로건이다. 사고 신고가 들어오면 즉각 현장에 출동,30분 내 보험금 지급까지 마무리하는 스피드 경영이 요체였다. 나이키와 프로그레시브의 명실상부한 '이륙(take-off)'은 이들 슬로건을 마련한 직후 이뤄졌다. 
  비전에는 또 현 위치에서 '창조적 긴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들이 담겨야 한다. 비전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며 현 위치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창조적 긴장은 둘 사이의 간격에 위기감을 불어넣으면서 임직원들을 '안전지대(comfort zone)' 밖으로 내몰 수 있어야 한다. 2000년 도요타의 오쿠다 히로시 회장이 밀레니엄 슬로건으로 들고 나온 '타도 도요타'가 대표적이다. 그는 조직 내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질타하면서 "도요타의 적은 내부에 있다"고 선언,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사히맥주의 히구치 히로타로 사장도 만년 3등 제품이었던 라거 맥주를 시장에서 모두 회수한 뒤에야 일본 맥주시장을 평정할 수 있었다. 출시 석 달밖에 안 된 수십만병의 라거 맥주들은 전량 페기됐다. 1995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구미공장에 500억여원어치의 불량 전화기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비전은 "몇 년 뒤에 얼마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식으로 너무 구체적이어서도 안되고 "고객에 사랑받는 기업이 되겠다"는 식의 진부한 방향으로 흘러서도 안 된다. 임직원들의 감응을 얻지 못하는 비전은 이미 죽은 비전이다. 그래서 비전 설정은 일종의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무관심의 부정적인 심리를 신뢰와 안도감,자신감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조일훈 산업부 차장 jih@hankyung.com

(2009-11-03, 한국경제)